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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번역이라는 지식의 통로, 그 중심에 선 여성들
역사의 모든 전환에는 정보와 언어의 확산이 있었다.
문명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문화를 다른 곳으로 전달하면서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 전달의 중심에는 ‘번역’이라는 행위가 있다.그러나 그 번역의 역사에서 여성 번역가의 이름은 자주 지워져 왔다.
수많은 여성들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종교 문헌, 철학서, 과학 저작, 외교문서, 문학작품을 번역했지만
대부분은 남성 저자의 이름에 가려졌고,
때로는 익명, 혹은 남성 명의로 출간되었다.이 글은 단순히 ‘여성 번역가도 있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녀들이 실제로 어떤 세계를 연결했고, 무엇을 바꿨는지를 조명한다.2. 철학과 종교를 옮긴 여성 번역가들
지식의 역사는 번역의 역사다.
특히 철학과 종교는 특정 언어, 특정 계층에서만 통용되던 고급 지식이었으며,
이 지식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내는 데 있어 여성 번역가들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고도 깊었다.
그녀들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것을 넘어서, 지식을 해석하고, 시대와 지역에 맞게 변형하고, 새로운 사유의 기반을 만든 존재였다.하지만 이들의 이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일까?
여성은 당시 사회에서 공식 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지식인의 지위를 갖기 위해 남성 후견인이나 종교 조직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 결과 번역은 종종 무급 봉사, 수도회 내 의무, 남성 저자의 보조 업무로 분류되며, 정식 명의에서 제외되곤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번역가들은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독일의 수도자이자 신학자, 자연과학자, 작곡가로도 활동했던 중세 유럽의 대표적 여성 지식인.
그녀는 단순히 신비주의 사상을 체계화한 것이 아니라,
라틴어로 쓰인 복잡한 신학 문헌을 독일어로 번역·편집하여 수녀원 내 후배들과 하층 계층에게 지식을 확산시켰다.그녀의 번역은 해설서이자 철학서, 동시에 종교 실천서로 기능했다.
예언, 병리학, 식물학, 여성 질병에 대한 그녀의 번역 및 재구성 작업은 오늘날 중세 여성 지식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투마이사르 알-팔라키(Tumaysar al-Falaki, 12세기)
이슬람 황금기에 활동한 페르시아 여성 철학 번역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고대 그리스 철학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당대 무슬림 지식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했다.특히 신플라톤주의의 개념인 ‘이데아’를 수피즘적 맥락으로 해석하여
신비주의 철학과 이슬람 신학의 접점을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녀의 번역은 지금까지도 전해지지 않지만,
**알-타브라지의 주석서에서 “팔라키의 해석이 타당하다”**는 언급을 통해 그 흔적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당시 여성 번역가가 지적 토론의 당당한 일원이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다.카탈리나 데 에라소(Catalina de Erauso, 17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독특한 인물로, 여성임을 숨기고 남성 수도사로 활동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신대륙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라틴어 성경과 신학 해설서를 원주민 언어(케추아어, 나우아틀어)로 번역하는 데 참여했다.이 번역 작업은 단순한 복사나 전달이 아니라,
서양 신학의 개념을 토착 언어의 개념 구조로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고민이 동반된 작업이었다.
종교 선교의 영역에서, 그녀는 언어와 사상의 교량자였다.중세 유대 여성 번역가들: 여성 공동체 속 비공식 학자들
13세기 유럽의 유대 여성 공동체 안에서는
히브리어, 아람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다루는 **여성 ‘문서 해석자’**가 존재했다.
이들은 남성 라삐의 설교를 지역어로 번역하거나,
탈무드 주석서를 여성 공동체에 전달하기 위한 해설 문서를 작성했다.이 문서들 다수는 익명 또는 단체 명의로 남았고,
종교기관의 승인 없이 내부 교육용으로 사용되었기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는 중세 유럽 여성 교육과 자율적 학문 활동의 중요한 증거로 평가된다.번역 그 자체가 ‘신학적 해석’이었던 시대
이 시기 번역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관과 신학, 인간관을 재구성하는 철학적 작업이었다.- 예를 들어, ‘죄’라는 단어를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번역할지,
‘신에 대한 불순종’으로 번역할지는 사상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 - “진리(Veritas)”를 “사실”로 옮기느냐 “신성한 깨달음”으로 옮기느냐에 따라
종교적 해석이 달라지고, 그 시대의 통치 이데올로기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
여성 번역가는 이런 개념적 선택의 갈림길에서 침묵 속에 주체가 되었고,
당대 문명의 철학적 지도를 다시 그리는 데 기여했다.요약하면
- 중세 유럽, 이슬람 세계, 식민지 시대 여성들은 종교적 지식의 번역자이자 사상적 교량자였다.
- 공식 명의는 삭제되었지만, 그녀들의 손끝에서 새로운 지식 구조가 시작되었다.
- 번역은 단지 말의 변환이 아닌, 지식과 권력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이 여성들은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에서 조용히 움직인 철학적 주체였다.
3. 과학과 혁명을 번역한 그녀들의 공로
지식이 움직일 때, 세계는 변한다.
하지만 과학이 ‘이해되는’ 데에는 수학적 식보다 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언어, 맥락, 전통, 해석이라는 장벽을 넘어 ‘전달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 복잡한 작업을 수행한 여성 번역가들이 있었고,
그들의 번역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넘어서 혁명의 뿌리를 만들었다.과학 지식을 대중화한 여성 번역가들
에밀리 뒤 샤틀레(Émilie du Châtelet, 1706~1749)
프랑스 귀족 출신이자 물리학자였던 그녀는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그 번역은 단순한 언어 전환이 아닌,
당시 뉴턴 역학을 모르는 유럽 대륙 지식인들에게 체계를 설명하고 해설한 작업이었다.- 그녀는 수학적 표현을 프랑스 수학 문법에 맞게 바꾸었고,
- 실험적 설명을 추가하여 뉴턴의 ‘만유인력’ 개념을 실제적 사례로 풀어 설명했다.
- 이 번역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젊은 학자들과 계몽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후대 물리학 교과서의 근간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번역은 가장 정확하고 독창적인 뉴턴 번역본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제시한 **찰스 배비지의 해석 기관(Analytical Engine)**에 대한 논문을
이탈리아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며,
단순히 번역하는 것을 넘어 해설 주석에서 ‘알고리즘’ 개념을 최초로 제안했다.그녀는 실질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의 개념을 최초로 문서화한 인물이지만,
그 주석이 논문보다 더 길다는 이유로 한동안 평가절하되었다.
그러나 그 번역 주석은 이후 디지털 컴퓨팅의 철학적 출발점이 되었고,
오늘날 그녀는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인정받고 있다.사상을 전파한 번역, 혁명의 서막이 되다
헬렌 마리아 윌리엄스(Helen Maria Williams, 1759~1827)
영국의 시인이자 번역가였던 그녀는 프랑스 혁명 직후,
프랑스 시민들의 정치적 선언문, 회의록, 공화주의 문서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녀의 번역은 영국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폭발시켰으며,
혁명 사상을 영미 사회에 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특히 **‘인권 선언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을 포함한 그녀의 번역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혁명 관련 영문 자료의 표준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다.수잔느 코세트(Suzanne Cossart) – 프랑스 여성 해방 사상 번역자
19세기 말,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 번역을 넘어, 주석과 프롤로그에서
프랑스 여성 참정권 운동과 연결된 해설을 덧붙였다.이 번역은 당시 프랑스 여성 단체들이 정치 참여 운동의 교과서처럼 활용했으며,
법률 개정 청원서에 인용되는 대표적 논거가 되었다.야마구치 하루(Haru Yamaguchi) – 일본의 사회주의 사상 번역자
1920~30년대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아나키즘, 페미니즘 사상을 독일어와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한 여성 지식인.
공식적으로 여성의 정치 참여가 제한되던 시절,
그녀의 번역은 젊은 여성 지식인들과 학생운동 세대에게 급진적 사유의 언어를 제공했다.당시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투옥되었으며,
일본 내 여성 번역가 중 최초로 ‘치안유지법 위반자’로 공판 기록에 이름을 남긴 인물로 알려져 있다.여성 번역가 = 혁명의 사전(辭典)
이러한 번역은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니었다.
- 새로운 세계를 설명할 언어를 만들고,
- 낯선 개념을 이해시킬 비유를 창조하고,
- 대중이 따라올 수 있는 사상적 언어의 층위를 설계했다.
여성 번역가들은 문장과 문단 사이에서
‘정치적 기획자’로 움직였다.정리하면
- 여성 번역가는 과학적 개념을 대중화하고,
혁명 사상에 감정과 맥락을 부여한 지식 전달자였다. - 그들은 해석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 정치·과학·철학의 도화선을 켠, 침묵 속 혁명가들이었다.
4. 전쟁과 식민지 시대, 이름 없이 기록된 여성 번역가
전쟁과 식민지는 언어를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작동했다.
총과 칼의 충돌 뒤에는 늘 통역자, 번역자가 존재했다.
정복자는 언어를 이해해야 피지배자의 지혜를 빼앗을 수 있었고,
저항자 또한 외세를 이해해야 생존의 전략을 짤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 번역가들이 활동했지만, 그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그녀들은 공식 문서의 끝에 서명하지 않았고,
기록자에게는 “통역 보조”, “여성 도우미”, “수녀” 혹은 “비공식 요원”으로만 존재했다.
하지만 실상은 언어와 문화의 최전선에 선 핵심 인력이었다.식민지 개척과 여성 번역가의 역할
동남아시아 - ‘원주민 여성 통역자’
19세기 후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유럽 선교사와 군정 관리의 언어를 현지 언어로 번역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혼혈, 혼인 여성, 현지 엘리트의 딸들로,
조기 유학이나 사제 교육을 받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이 여성들은
- 선교사의 설교를 실시간으로 통역했고
- 성경과 의학 서적을 번역했으며
- 현지 민속지, 제례, 식물학적 지식을 제국 학자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주교 부속 여성 해설자” 혹은 “토착 통역 보조”로만 기록되었고,
번역된 자료에는 유럽인의 명의만 남았다.영국령 인도 – ‘비비(Bibi)’ 통역자
영국 식민지 시절 인도에서 고용된 여성 가정부 혹은 비비는
실상 가정 내 통역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벵골어, 우르두어, 힌디어 등 복잡한 방언을 영어로 번역하며
영국 관리들과 하인, 상인, 농민 간의 소통을 담당했다.- 특히 여성 전용 공간에서의 조사나 정보 수집 시
여성 비공식 통역자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 정치·법률 관련 서류의 사적 해석을 맡기도 했고,
전염병, 세금, 재산 분쟁 등의 지역 행정에도 실질적인 언어 브로커 역할을 했다.
이들의 언어 감각과 문화 중재 능력이
식민 통치의 안정을 가능하게 만든 숨은 구조였다.전시(戰時), 여성은 어떻게 전선에서 언어를 옮겼는가?
제1차 세계대전 – 프랑스 전선의 여성 통역병
전쟁 중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수천 명의 여성이
부상자 수용소, 포로 심문소, 전쟁 회복 캠프에서
다국적 언어를 통역하며 일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플랑드르어, 네덜란드어를 넘나들며
전선 상황을 번역하고, 포로들의 진술과 신문 내용을 공식 보고서로 작성했다.이들은 ‘전시 공무원’으로 등록되지 않았고,
전후 보상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하지만 군사 작전의 정보 확보와 외교 협상 초기 기록 정리에 큰 공헌을 했다.제2차 세계대전 – 아시아계 여성 통역 요원들
미군은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본계, 중국계, 한국계 이민 여성들을
**비밀 번역요원(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Language School)**으로 채용했다.
그녀들은 일본군 전단지, 정보문서, 암호 해독 자료를 번역했으며
포로 심문과 방송 선전 문구도 재작성했다.그러나 인종과 성별이라는 이중 차별 속에서
그녀들의 공로는 ‘내부 언어 정리’로 축소 기록되었다.
전후 문서에서 그들은 “내무부 민간 계약자”로만 기재됐다.특수 사례: 통역이 정치적 무기가 된 경우
조선 – 여성 선교사 통역 조력자들
19세기 말 조선에 파견된 미국 여성 선교사들은
복음서, 보건 매뉴얼, 여성 위생서 등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조선 여성 보조 인력을 고용했다.- 이들은 중인 출신 여성, 상류층 해방 여성, 궁녀 출신 등으로
다양한 언어·한문·구술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 번역과정에서 성경 구절의 어휘 선택, 비유 해석, 조선식 관념 도입 등
깊은 개입을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대체로 선교사 명의로 출판되었고,
보조자의 이름은 ‘○○집사’, ‘○○씨’ 정도로 남았다.번역이 곧 식민의 도구이자 저항의 무기
이 시기 여성 번역가는 두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식민 통치를 가능케 한 ‘언어 브로커’,
다른 하나는 피식민자의 목소리를 재해석한 저항자였다.그녀들은 단지 글을 옮긴 것이 아니라
- 전염병 예방 지식,
- 교육 기획서,
- 종교 개념,
- 문화 정체성을 통역하고 재구성했다.
한쪽에서는 제국의 입장을 전달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민중의 기억과 감정을 번역했다.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 수많은 여성 번역가가 공식 기록에서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통역하고 옮긴 언어는 문서 속, 교육 속, 정책 속에 살아 있다. - 언어는 권력이고, 번역은 지식의 생태계를 뒤흔드는 조용한 무기였다.
- 이제는 그들의 작업과 흔적을 단지 ‘보조’가 아닌,
문화적 정치 행위로서 복원해야 한다.
5. 여성 번역가의 한계와 검열, 왜 이름이 사라졌는가
여성 번역가들이 역사에서 지워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 사회적으로 여성은 ‘주체적인 창작자’가 될 수 없다는 인식
- 번역은 창작보다 하위 개념이라는 평가
- 일부 여성 번역가의 작업이 남성 명의로 출판되거나 ‘공동 번역’ 처리
- 검열과 자율성의 부재로 인해 사상의 왜곡을 피할 수 없는 구조
19세기 영국에서는 여성 번역가들이 성서, 종교 문헌 번역에 참여했지만
문맥 해석이 기존 교리와 다르면 "오역"으로 낙인찍혀 필터링되었다.
그 결과, 여성 번역가는 다시 비가시화된 채 출판 현장 뒤로 밀려났다.6.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번역의 주체들
오늘날 우리는 번역을 통해 전 세계를 연결한다.
AI 번역기, 자동 자막, 실시간 동시통역 등
기술의 발달은 번역의 형식을 바꾸었지만,
지식을 읽고 해석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는 여전히 ‘사람’이다.그리고 그 주체들 중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바로 여성 번역가였다.그녀들은
- 철학을 설명하고,
- 과학을 확산시키며,
- 혁명을 불러오고,
- 전쟁과 평화의 조건을 통역한
무명의 다리이자, 조용한 연결자였다.
우리는 이제 그녀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 번역이 남긴 지적, 정치적, 문화적 흔적을 복원해야 한다.'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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